박상희

꽃샘추위가 아직 끝나지 않은 조금 쌀쌀한 날이었다. 오랜만에 두 딸을 데리고 금성산으로 향했다. 예전엔 포장도 되지 않는 구불구불한 길이었는데 어느새 2차선 도로로 쫙 뚫린 아주 넓은 길이 되어 있었다. 경현리 입구에 있는 저수지엔 맑은 물이 찰랑 찰랑 가득 차 있었다. 저수지 옆으로 쭉 늘어진 버드나무 사이로 철 이른 봄바람이 우리를 반겨 주었다. 시멘트로 포장된 길을 걷는 것이 어쩐지 산으로 가는 길이 아닌 것 같았다. 아니 운치 없는 편리함이 꼭 좋은 것만도 아니었다. 산은 울퉁불퉁한 흙을 밟으며 걸을 수 있는 것이 자연스러운 게 아닐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딸아이와 함께 금성 산을 오르려니 갓 난 아기였을 때 아버님과 같이 동행했던 때가 생각났다.

지금은 돌아가시고 안 계신 아버님은 금성산에 오르기를 무척이나 좋아하셨다. 집에서 가까운 거리라는 이점도 있지만 다보사에 계신 스님 한 분이 아버님께 무척 따뜻하게 대해 주신다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었다.

내가 첫 아이를 낳고 한 달쯤 되었을 때 초파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아버님은 내게 큰손녀를 낳은 기념으로 옷을 한 벌 맞춰 주셨다. 양장점에까지 손수 같이 가신 아버님은 마음에 드는 걸로 고르게 하셨다. 나는 수수한 베이지 색 투피스로 정했다. 몸 치수를 재고 가봉 날짜까지 정하고 나오려고 하는데 갑자기 아버님은 노랑 천을 내게 감싸며 “이 색깔은 우리 며느리에게 어울리지 않겠소?” 주인을 향해 묻는 것이었다. 주인은 새댁은 피부가 깨끗해서 아주 잘 어울릴 거라고 거들어 주었다. 아버님은 젊은 아이가 산뜻한 색을 입어야 마음도 밝은 거라며 노란 색으로 골라 주셨다. 그땐 너무 화려한 건 아닐까 걱정도 했지만 막상 옷이 완성되어 입었더니 내 마음에 꼭 들었다.

드디어 4월 초파일 날, 아버님은 태어난 지 한 달밖에 안된 딸아이를 데리고 다보사로 가자고 했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아버님이 맞춰 준 노랑 투피스를 입고 거기에 맞춰 뾰족 구두까지 신고 길을 나섰다. 경현리 입구까지는 차를 타고 갈 수 있었지만 초파일로 사람들이 붐벼서 다보사 가는 길 앞에서 차를 멈추게 하였다. 아이를 안고 꾸불꾸불한 산길을 걸어가는 것이 그렇게 힘이 들 수 없었다. 온 몸은 이미 땀으로 젖어 줄줄 흐르기 시작했고 아이도 칭얼거렸다. 날씨가 더워서 헉헉거리며 자꾸만 혀를 날름거리는 것이었다. 그 모습을 본 아버님은 아이가 목이 마른 것 같다며 중간에서 쉬어 가자고 하셨다. 나는 잔디에 앉아 아이에게 젖을 물렸다. 꿀꺽 꿀꺽 젖을 먹은 아이는 이내 잠이 들어 버렸다. 힘들어하는 내 모습을 보신 아버님은 다보사까지 손수 아이를 안고 가셨다.

다보사에 도착하니 수많은 등에 불이 켜져 있었고 숫자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조용한 모습으로 두 손에 촛불을 들고 요사채를 돌고 있는 사람들이 경건하기까지 했다. 금성산 다보사는 신라 문무왕 때 원효 스님이 창건하여 일 천 삼백여 년을 지나면서 호국(護國)사상의 고취와 지역민의 정신적인 귀의처가 되어왔다고 한다.

아버님의 뒤를 따라 우리 식구의 이름을 써서 불을 밝히는 모습도 배웠다. 절 내에는 은은한 향불이 속세의 찌든 때를 씻어내듯 자욱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다보사 경내에서 종소리가 중생들의 고뇌와 번뇌를 모두 씻어주기 위해 청아하게 들려오고 사람들은 점심 공양을 한다고 줄을 섰다. 듣던 대로 반찬은 깻잎, 고사리나물, 취나물 등등 일곱 가지나 되었고 구수한 된장국에 밥을 몇 그릇이나 비웠다. 속세에서 말하는 육고기나 생선이 단 한 가지도 없었지만 그 어느 진수성찬보다 맛있을 수가 없었다. 아버님 말씀대로 절에서 기르는 채소들은 산 속에서 맑은 공기만 맡고 자라서 특별한 맛을 내었다.

갓난아기가 커서 어느새 처녀티가 나도록 성숙해진 딸아이에게 그 옛날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바람은 차가웠지만 움터오는 봄은 막지 못하는지 진달래꽃이 군데군데 많이 피어 있었다. 두 딸아이는 꽃을 꺾느라 정신없이 산 속을 헤매고 있었다. 어느새 손에는 진달래꽃이 한 아름 안겨 있었고 이마에서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저만큼 다보사의 절 모습이 보이자 가파른 언덕인 것도 무시한 채 쏜쌀같이 뛰어갔다. 목이 말랐던 것이다. 작은 조롱박에 졸졸 흐르는 맑은 물을 몇 번씩 먹어댔다. 조용한 절간에 아이들의 재잘거리는 소리가 들렸는지 스님 한 분이 밖으로 나오셨다. 두 손을 합장하여 정중하게 인사를 드리고 아버님 말씀을 드렸더니 뜻밖에도 기억하고 계셨다. 49제를 지냈던 것도 모두 알고 어머님의 안부까지 묻는 것이었다. 너무나도 고맙고 반가워서 나는 노스님의 손을 꼭 잡고 눈물까지 핑 돌았다. 꼭 아버님을 다시 만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스님의 안내로 법당 안으로 들어가 오랜만에 부처님께 절을 올렸다. 부처님의 인자한 모습 속에 아버님의 웃는 얼굴이 언뜻 언뜻 보이는 듯 했다.

박상희 parksh-9@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