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종 시인/화가

꼴불견 여성탑을 지나 삼위일체탑, 물올림탑, 성모수태탑, 비밀탑, 제1, 제2무명탑, 뾰뜨르탑, 모스크바강탑, 헬레나탑, 경종탑, 황제의탑, 구세주탑 등이 크레물린의 거대한 성벽을 옹위하고 있는 이들 축조물은 건축학적 미감 또한 두드러진다.

붉은 광장을 벗어나 시가지를 들어섰다. 러시아는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전쟁과 종교가 혼성 이중주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토록 흥왕하던 종교는 전쟁의 회오리에 수난을 겪다가 얼마만큼의 세월이 흐른 후 종교와 전쟁은 다시금 앙상불을 이루며 러시아를 받쳐 든 두 개의 거대한 횃불로 타오르고 있다.

모스크바 강을 가로 질러 2차 세계대전 승전기념탑을 찾아가는 길 정면에 나폴레옹을 이기고 세웠다는 개선문이 보인다. 차를 멈추고 멍텅구리 계단을 지나 전쟁을 승리로 이끈 크티뿌죠 장군상과 만났다. 전승탑은 141.8m로 아스라이 올려다 보이고 분수가 뿜어내는 물줄기는 놀랍게도 1418개나 되었다.

분수의 숫자는 전쟁일수를 의미한다고 하니 4년 가까이 전쟁을 치렀던 모양이다. 삼각 면 탑에 새겨진 1941-5년까지의 숫자적 표시, 독일로 상징된 토막 난 드래곤의 형상, 부채꼴로 되어있는 전쟁기념관의 양끝에 승리의 여신이 불어대는 천사나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이 기념관은 1995년에 완공했으니 20년 쯤 지난 것이지만 준공식 때는 일본만 불참했었다 한다.

우리는 2차 세계대전, 나폴레옹 전투, 폴란드전쟁 등의 승리를 기념하는 3명의 용사상을 지나 레닌 언덕으로 향했다. 러시아는 워낙에 산이 없는 나라라 언덕의 의미는 특별했다. 자작나무, 소나무 등이 풍치를 이루며 도열한 도로를 따라 대사관 촌을 거치고 부동자세로 기립하고 있는 모스크바대학을 굽어 돌았다.

모스크바 대학은 1775년에 설립되었으나 지금의 건물은 신축한 지 70년쯤 된 것이라 한다. 200명의 한국학생을 포함하여 규모가 3,200명 정도라 하니 그리 큰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처럼 예술대학은 없고 자국학생에게는 수업료가 없다 한다. 러시아의 체제변화 이후 북한 학생들만 모두 철수했다는 사실 또한 변하고 있는 시류의 한 모습이었다.

레닌 언덕에 이르렀다. 이 언덕은 원래는 '참새의 언덕'으로 통하던 곳이다. 이 나라 참새들은 이 정도의 높이도 숨이 차서 한차례쯤 쉬었다 가는 곳이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모스크바 인들은 '우리도 레닌 언덕이 있다'고 배를 내밀만큼 대단한 자부심으로 구경시키는 곳이다.

때마침 결혼한 몇 쌍의 신혼부부들이 '참새언덕'을 배경으로 셔터누르기에 바빴다. 허나 우리는 그런 따위는「남의 일」처럼 관심이 없고 언덕 아래 펼쳐진 배부른 지평선 형상의 모스크바를 조망할 수 있었다. 정면으로 레닌 주경기장 외에 좌우측에 모스크바 강과 올림픽 때 시설했다는 스키 활강대가 녹색 시가지에 누워 흐름을 만들고 있었다.

러시아에는 눈에 잡히는 세 가지 풍경이 있었다. 하나는 결혼한 신부도 촬영하다말고 담배피우더라는 것, 둘은 대책 없이 뚱뚱한 비만형 여성이 많다는 것, 셋은 사람들의 얼굴에서 도대체 표정이 읽히지 않았다는 것.

'모스크바는 눈물을 믿지 않는다'는 영화가 있었다. 그러나 표정 없는 러시아인은 사귈수록 깊은 정과 믿음을 준다는 것이 가이더의 설명이었다.

볼 것은 많고 시간은 짧고. 주마간산 식 여행은 속도를 더해 갔다. 구소련 시절 최초의 우주인으로 인공위성에 올랐던 '유리가가린'의 상이 세상에서 가장 키 큰 사람처럼 다리를 길게 늘이고 서 있었다. 우리는 숙소로 돌아오면서 19세기 사실주의 화가인 레퐁의 기념공원과 18세기의 모습이 잘 보존된 호수, 숲, 다리, 마을 등을 살필 수 있었다.

러시아의 돔식 지붕 감상법, 이 나라는 동이 금보다 비쌀 만큼 금이 흔하다. 또한 황제나 귀족들이 신분 과시의 목적으로 순금 혹은 도금한 돔식 지붕을 선호했을 것이라는 것. 그래서 금이 동에 밀리는 신세가 되었다.

보드카 마시는 법, 호흡을 정지한 뒤 마시고 상대의 옷이나 자신의 겨드랑이 냄새를 맡으면 훨씬 수월하게 견딜 수 있다고 한다. 러시아에서 말해서는 안 되는 3가지. 40도 이하의 술(보드카 때문), 40Km 이내의 거리 (그만큼 걷는다는 뜻), 영하 40도 이하의 추위 (그만큼 춥다는 뜻).

러시아에서 이틀 밤을 자고 아침 산책에 나섰다. 아직 청소 전이라 여기저기 쓰레기가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었다. 지하철 역사를 둘러보고 재량 있는(?) 힘 있는 자들의 돈 빼먹는 풍토가 감잡혔다. 까마귀 날고 있는 숲속에 들자 경찰 제복의 젊은이 둘이서 검문을 해왔다. 여권을 줬더니 살피는 척 하면서 연신 술 마실 돈을 요구했다. 우선 말이 통하지를 않아 답답했고 상당 시간 실랑이를 벌이다 풀려나 별일은 없었지만 불쾌한 체험의 한 대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