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종 시인(화가)

조반을 마치고 제2의 코스인 상트빼째르부르그로 향했다. 거리상으로 750Km가 넘건만 비행기로는 1시간 반의 거리. 러시아는 부러울 만큼 영토가 광활한 나라였다. 그러나 상대와 맞부딪쳐서 이긴 적은 없고 머리를 써서 이겨온 나라다. 그 대표적인 예가 얼음전쟁이다. 이 전쟁의 영웅 레스키 장군은 말과 군대를 호수로 끌어들여 적군 모두를 수장시켜 버렸다. 러시아인의 민족성은 우선 끈기가 있다. 그리고 지도자를 중심으로 끝까지 단결하며 협동심을 잃지 않는다. 이것이 이 나라 영토보존의 바탕 힘이 되었던 것 같다.

러시아인은 예술적 성향이 강하다. 거지 할머니도 오페라나 발레 관람이 생활화되어 있는 나라, 그리고 관람 갈 때는 정장차림에 품격 높은 시간을 향수한다. 러시아의 국민성은 진취적이나 편협한 사실주의에 고착되어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유는 아직 충천하던 혁명적 시기가 얼마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라 한다. 그리 보면 러시아만큼 역사, 자연, 문화가 혼연일체가 되어 거대한 생명체로 숨 쉬고 있는 대륙도 드물 것 같았고 부러운 일이었다.

국내 항공기이건만 허리띠까지 벗어서 검문을 받았다. 여기에다 비행기가 나는 동안은 또 다른 자리에서 여행용 가방이 샅샅이 검색되었다. 우리로써는 상상도 할 수 없이 기분 나쁜 일이다. 그럼에도 낯선 곳에 대한 설렘과 기대감으로 시간 시간이 행복감으로 밀물져 왔다. 참 맑고 푸근한 날씨에다 상공을 떠가던 구름마저 더 없이 아름다웠다. 차로 지나는 초원을 보면서 공기가 장난이 아니게 상쾌했다. 그래 공기 통조림 원료가 모두 여기에 모여 있으니 몽땅 퍼 담자 했더니 좌중이 웃었다. 빼째르부르그도 인구 500만이 넘는 대도시다. 그리고 푸틴 대통령의 고향이라는데 맑은 날씨임에도 어딘가 음산하고 쓸쓸했다. 한마디로 북방도시에서나 느낌직한 닥터 지바고적 정서가 김 서려 있었다.

1703년에 터 잡기 시작한 성빼째르부르그는 우리나라로 치면 고도 경주와 항도 부산을 합성한 도시쯤 된다면 이해가 쉽겠다. '빼째르'는 '베드로'’, '피터', '뾰뜨르' 등과 동일어이다. 그리고 양력으로 5월 27일이 이 도시의 생일이다. 스웨덴과의 전쟁이 계기가 되어 1770년에 이곳으로 수도를 옮겨 200년을 넘게 지속되었기에 러시아에서 문화유산이 가장 많은 아름다운 도시라 했다. 이곳에 와서도 밤의 길이는 토끼꼬리처럼 짧았다. 낮이 가장 긴 하지가 되면 아예 밤은 증발해 버려 24시간을 온통 독서하고 산책하는 등 백주대로의 평상생활의 연속이라고 한다.

겨울을 건너지 않은 자 여름을 누릴 자격이 없다? 완전한 백야 뒤에는 완전한 흑주黑晝 또한 숨 쉬고 있다! 질서교체적인 작용과 반작용의 이치랄까. 이 도시에 전쟁의 의미는 컸다. 승리의 광장에서 시내 중심부까지는 9950m. 그럼에도 도시의 이름은 '레닌 그라드'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레닌은 청년시절 사상가도 혁명가도 아닌 똑똑한 1등 청년이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의 형 '다샤'의 죽음이 있었고 그 뒤에 형이 소유한 탐독서들을 읽고 러시아를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로 변모시킬 이상을 키웠다. 158cm의 작달막한 코트차림에 공장근로자의 베레모를 쓴 레닌은 농민을 상징하는 '낫', 노동자를 상징하는 '망치'를 징표삼고 1924년 혁명을 시작으로 하층민들의 대변자가 되었다. 1991년 사회주의의 붕괴로 국가명칭, 도시명칭이 바뀌면서 이 도시도 상뜨 빼째르부르그가 되었다. 레바강이 이 도시를 남북으로 관통하여 흐르고 시내 어디를 가나 물과 만날 수 있는 곳이다. 거리는 단독주택 한 채 없는 완전 주상복합 건물들로 정비되어 자꾸만 상해에서 보았던 임시정부청사 거리가 연상되었다.

우리는 이 도시 관광의 첫 번째 코스로 에르미타쥐 박물관을 찾았다. '에르미타쥐’는 프랑스어인데 '휴식 공간', '은둔지'를 의미한다는 것. 세계 3대 박물관을 자부하는 이곳은 황제 개인 박물관 시절은 이미 오래고 이제는 매년 수천만 명의 구경꾼이 다녀가는 자긍심 높은 영혼발현의 유명 관광지로 변했다.  이 박물관에 부여된 명예는 훌륭한 건축양식, 세계문화예술의 화려한 컬렉션, 그리고 상트 빼째르부르그와 관련한 황제 주택의 탄생과 발전, 쇠망 등의 과거사로 부터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에르미타쥐의 기원은 러시아 황제들의 창조적이고 계몽적인 사업에 터 잡고 있다. 이 건물 극장 자리에 세워진 '뾰뜨르 1세'의 겨울 궁전은 강변을 따라 계속되는 궁전 건축의 효시가 된다. 그리고 에르미타쥐 극장은 오늘날 박물관을 이루고 있는 건물이다. 이 건물은 빼째르부르그의 중심부에 150여 년이라는 세월에 걸쳐 이루어낸 건축 앙상불의 극치이다. 에르미타쥐 콤플렉스에서 러시아의 역사는 자신의 다양한 모습을 투영하고 있었다. 이들 속에 녹아있는 인간정신은 역사와 유물이 하나라는 사실을 실감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