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종 시인

공항시간을 염두에 두고 이른 점심을 먹었다. 오늘밤은 기내 1 박이다. 비행기타고 다니는 외국여행이라는 게 왕왕이 외화내빈인 경우가 다반사다. 정오도 되기 전에 점심상을 받았건만 비행기에 오르는 시간은 10시 반.

물론 그 사이에 다시 모스크바비행기를 타야하고 거기에서 시간에 맞춰 다음 비행기를 대비해야 한다. 여행기간 전체를 두고 순수관광시간은 당나귀머리에서 코 빼고 귀 빼고 나면 남는 게 없다는 속담이 제격이다. 허전해서 뒤돌아보고 빈손이어서 뒤돌아보는 게 여행의 생리이다.

그래서 여행하는 시간은 왕왕 살아온 날들을 살피는 경우가 많다. 이를 두고 앙드레 지드는 "여행과 질병만이 자아를 돌이키게 해준다."했던가. 여행길에 오르지 않고 크게 아파보지 않고 어찌 자신의 지나온 시간을 살펴봤다 할까.

자투리 시간을 내어 모스크바 할인마트를 찾았다. 꼭이 무엇을 사겠다는 목적 이전에 서민들의 일상을 감 잡기 위한 코스였다. 할인마트는 덴마크 직영이고 백화점식 상품배열로 손님들을 부르고 있었다. 일행은 가이더의 뒤만 밟으며 비행기 시간에 늦지 않으려고 그야말로 주마간산 식 쇼핑을 했다. 우리네 마트 풍경보다는 많이 한산해 보였다. 경제력도 문제겠지만 사회주의란 게 흥청거리는 맛은 적을 것이다.

이제는 더 물릴 시간 없이 공항으로 달렸다. 공항까지는 지근의 거리인 데도 차가 엄청 밀렸다. 한국에서 온 우리의 여행을 어찌 알았을까. 우리 일행 보겠다고 러시아사람들이 너도나도 차를 몰고 길거리에 쏟아져 나온 것이 분명했다. 비행기에만 오르면 내일 오전 11시에 한국 땅 인천공항에 도착할 것이다.

생각해보면 헤매 다닌 러시아에서의 시간들이 퍽이나 아리송하게 느껴졌다. 부러운 만큼 채워졌나 하면 눈뜨나 감으나 아직 멀었다는 생각만 밀물져 왔다. 러시아에서 볼거리는 제국주의 하의 유물이었다.

땅은 넓고 사람은 적어 광활한 영토 지키기가 장난이 아니게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더더욱 내외적으로 전쟁이 잦았던 나라였다. 가진 자는 엄청 누리고 빈한한 자는 손가락이나 빠는 세상사는 여기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러시아에서 사회주의는 많이 식어 있었다. 자본주의 도입이 사회주의적 관습과 자주 충돌하겠지만 차츰씩 개인주의의 마력에 길들여지고 봄바람 부는 낙원위에 집짓고 싶으리라.

다시금 떠오르는 문장 하나! '러시아는 눈물을 믿지 않는다.' 그럴지도 모를 일이다. 7개월간의 동토가 러시아인들의 표정을 만들었다면 어찌 흘러내릴 눈물이 남아 있으랴. 봄바람이 돋아나는 러시아는 수목들이 감추어둔 엽맥처럼 희망의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견고한 석조건물이 연도의 인파처럼 줄지어선 러시아! 전제 군주 시절과 사회주의 혁명 시절 모두는 눈물을 만들지 못한 세월이었다. 그래서 현실에서 사실주의를 향한 일로매진만 세상을 열어가는 유일 통로였으리라.

솔직히 필자는 러시아의 사실주의에 숨이 막혔다. 가도 가도 끝날 것 같지 않는 그 융통성 없는 사실주의의 밀림이 나를 엄청 질리게 했다. 그래서 러시아인들의 표정이 저 얼어붙은 동토처럼 차고 무겁게 느껴졌던 것일까? 들어가는 입구가 없다는 KGB도 이제는 입구를 만들어 가겠지. 일방통행이 많고 좌회전이 없었던 크레믈린 거리의 통행규칙도 더 많은 변화를 꿈꾸며 달려가겠지.

정말이지 기다리는 희망처럼 반전의 그 드라마는 모스크바강이나 네바강 강물처럼 더 융융한 흐름을 만들어 흘러갈 것이다. 그것이 체제를 바꾸고 사상을 바꾼 러시아의 더 큰 미래가 될 테니까! 영광과 비애가 하나의 흐름으로 뒤섞여가고 더 많은 탐색의 비가 되어 내릴 때쯤, 버려진 땅 시베리아에도 지젤의 아름다운 선율은 불 켜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