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정직하게 품었던 스승, 신영복의 아름다운 사색

"처음으로 하늘을 만나는 어린 새처럼, 처음으로 땅을 밟는 새싹처럼, 우리는 하루가 저무는 겨울 저녁에도 마치 아침처럼, 새봄처럼, 처음처럼 언제나 새날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산다는 것은 수많은 처음을 만들어 가는 끊임없는 시작입니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나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 고 신영복 선생의 책 《처음처럼》 개정신판이 출간됐다. 신영복 선생은 생전의 한 인터뷰에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 무기수 옥중 서간이었다면, 이 책 《처음처럼》은 다시 쓰고 싶은 편지"라고 밝혔다.

개정판 《처음처럼》은 페이지마다 여백에 그림이나 글씨가 실렸다. 신 선생은 2007년 초판 서문에서도 "막상 글보다 더 망설였던 부분은 그림이었습니다. 글이 줄어들고 상대적으로 그림의 비중이 더 커지면서 그 부족함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썼다. 그럼에도 그는 "언어의 관념성과 경직성이 그림으로 하여금 구체화되고 정감적이 되기를, 절삭된 특유의 빈 곳을 그림이나 글씨가 조금이나마 채워줌으로써 그 긴 여정에도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글과 그림을 함께 실었다"고 했다.

개정신판은 분량이 늘고 구성도 많이 바뀌었지만 처음과 마지막은 변함이 없다. '처음처럼'으로 시작해 '석과불식'으로 끝을 맺는다. 신영복 선생은 '석과불식'을 가리켜 "20년 동안 의지했던 희망의 언어"라고 했다. 한겨울에도 석과(씨 과실)는 먹지 않고 씨를 받아 땅에 묻어 새싹을 피운다. 다 떨어뜨린 잎사귀는 환상과 거품이며, 환상과 거품을 청산하고 나면 나무의 뼈대가 드러난다. 우리는 뼈대를 직시할 때 마지막 한 알 남는 희망에 비로소 눈이 닿는다.

고난의 시대, 우리에게 신 선생이 남긴 마지막 메시지는 곧 '희망'이다. "그러나 그 가지 끝에 서 빛나는 빨간 감 한 개는 '희망'입니다. 그 속의 씨가 이듬해 봄에 새싹이 되어 땅을 밟고 일어서기 때문입니다. 그 봄을 위하여 나무는 잎사귀를 떨구어 뿌리를 거름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모두 4부 215편의 단장(短章)으로 구성되었으며, 초판본과 비교하면 90편 가까이 새로운 원고가 추가되었다. 첫 글 '처음처럼'과 마지막 글 '석과불식'만 그대로 두고 전체구성을 대폭 바꾸었다.

1부 '꿈보다 깸이 먼저입니다'에는 삶에 대한 사색, 신영복 특유의 깨우침과 성찰의 잠언들을 모았다. 2부 '생각하는 나무가 말 했습니다'에는 우리와 더불어 살아가는 생명의 가치, 생활 속에서 발견하는 진리 등 신영복의 주옥같은 에스프리를 담았다. 3부 '공부하지 않는 생명은 없습니다'는 머리부터 가슴, 그리고 가슴에서 발까지 가는 머나먼 여행길, 곧 우리 삶의 공부에 대한 이야기이다.

특히 이 장에는 20년의 엄혹한 수형생활을 「나의 대학 시절」이라 명명하던 신영복 선생의 감옥 일화들이 담겼다. 이 글들은 초판본에서는 실리지 않은 것이다. 4부 '삶은 사람과 만남입니다'는 신영복 선생의 주요 사상인 관계론, 연대와 공동체에 대한 호소, 현재 한국 사회의 삶에 대한 연민과 그 해법이 주조를 이룬다.

덧붙여, 선생의 서거 후 새 책 출간인 터라 그 자취를 기리기 위하여 초판에 한해 선생의 아름다운 육필 산문 〈청구회 추억〉의 영인본을 만들어 독자들과 나누고 있다.

〈청구회 추억〉은 사형수 신분이었던 그가 수감 2?3년 전까지 이어진 어린 꼬마들과의 추억을 소재 삼아 옥중에서 쓴 수필이다. 신 선생 스스로 "'청구회 추억'에서 나는 사람을 만나는 법, 사람을 대하는 법을 배웠다"며 "20대 후반의 청년이 죽음의 문턱에 서서도 이렇게 아름다운 이야기를 이렇게 담담하게 그려낼 수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경험하게 되었다"고 회고한 글이다.

 《처음처럼》은 신영복 선생이 쓰고 그린 글과 그림 가운데 그 고갱이들을 가려 모은 잠언집이다. 선생의 평생의 사상이 압축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부재 '신영복의 언약'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신영복 선생이 독자들에게 전하는 말(言)과 약속(約)으로 이루어져 있다. 비록 저자는 이 세상에 없지만 새로운 독자는 끊임없이 탄생하며, 저자는 책과 함께 독자들의 삶에 동행인이 될 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