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3학년 12월 초로 기억한다. 5일까지가 마감일이었으니까. 신춘문예 원고를 신문사에 발송하고 우체국 문을 나서니 깊은 한숨과 허탈감이 밀려왔다. 어스름 저녁 분위기에 들뜨기 시작하는 충장로를 걷다 보니 나는 없고 타인들만 북적거렸다. 문득 이 도시와 사람들로부터 격리되고 싶었다. 어디 외딴섬에 가서 허둥대는 나와 따로 만나는 시간을 가질 수는 없을까.

 

선유도를 다녀온 친구가 다시 한번 가고 싶은 섬이라고 했던 말이 생각났다. 육지를 바라보며 바다 어디쯤에서 출렁이며 떠 있을 그 섬. 뼛속까지 비운 새들이 바람에 밀리지 않으려 힘겨운 싸움을 하는 해변. 갑자기 입안이 마르며 갈증이 몰려온다. 그래 그곳으로 가자. 

 

광주역에서 열차를 탔다. 이리역(지금은 익산)에서 갈아타고 군산에 도착했다. 뭐 그리 급한 볼일 있다고 서둘러 선유도 가는 배에 올랐다. 겨울이 턱밑인 바다는 잔잔했지만 바람 끝은 차가웠다. 푸른 바다에 보석을 흩뿌려 놓은 듯한 윤슬이 끊임없이 앞장을 섰다. 바다는 그 자리가 일상이지만 순간 이동한 듯한 난, 어제와 다른 지금이 모든 것이 생소하다. 

 

선착장에서 멀지 않은 섬마을의 초입, 우물가 아줌마에게 “민박 치는집 어디에요?” 하고 여쭸더니 울타리 너머 감나무 집을 가리킨다. 육지로 유학 간 아들의 빈방. 아궁이에 불을 때는 조그만 부엌이 있고 단정한 창호지 문짝에 조그만 창을 젖히면 신우대 숲이 보이는 방이었다. 간단한 옷가지를 넣은 가방을 윗목에 두고 집 앞 고샅을 벗어나 밭두렁을 따라 야트막한 산을 올랐다. 회색빛 서해가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지금 혼자라는데 생각이 미치자 문득 누군가랑 함께 왔더라면 하는 생각이 들면서 그 누군가를 생각했다. 서로 아무 말 없더라도 그냥 곁에 있기만 해도 이심전심일 사람을.

 

밤이 되자 눈이 송이로 내리기 시작했다. 주인집 아저씨가 아궁이에 장작불 지펴놨다며 저녁상을 들여놓으신다. 이쁜 호리병에 담은 막걸리와 함께. 얼마나 배가 고팠던지 밥 한 공기 더 달라는 말을 하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막걸리의 취기와 따뜻한 아랫목의 나른함이 나를 무너뜨렸다. 새벽녘 신우대잎 부딪히는 소리에 잠을 깼다. 가만히 귀를 열어 밖의 웅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잠들지 못하는 바다가 뒤척이는 소리였다. 

 

밤새 내린 눈으로는 부족했던지, 아침부터 굵은 눈발이 섬을 감춰버릴 듯이 쏟아졌다. 눈 내리고 있는 바다가 궁금했다. 마을 우물가를 지나 선창 쪽으로 나서니 시야는 온통 회색빛이었다. 날개 달린 듯 쏟아지는 눈발 속에 섬은 바다 위를 유빙처럼 떠돌고 있었다. 눈바람 치는 밤을 어디서 새웠는지 허기를 달래려는 새들의 날갯짓이 안타깝다. 선착장 어선들은 동면에 들었는지 눈에 덮인 채 잠자듯 누워있었다. 궂은 날씨 때문에 쉬는 것은 인간만은 아니구나. 서로 살 부딪치며 내는 소리가 그만 일어나라고 깨우는 것처럼 들린다. 

 

낮에는 눈이 언제 그치나 걱정하다가도 밤이 되면 올겨울 내내 그치지 않고 내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쩔 수 없이 섬에 갇혔다는 구실을 만들 수 있으니까. 그러면서도 매일 아침 선착장에 나가 군산으로 갈 수 있는 여객선이 언제쯤 들어오는지를 확인하고 돌아왔다. 통제가 되지 않은 자연은 불안하고 무서웠다. 

 

밤에는 신우대잎 우는 소리를 들으며 나에게 왜 시를 쓰느냐고 물었다. 성장기의 지적 허영이기도 했지만, 한 편을 짓고 보면 새봄을 틔우는 연둣빛 새싹이 보였다. 내 존재의 의미를 확인하는 일. 때로는 사회 구조의 불합리와 자기모순에서 허우적대는 나를 내 언어로 쏟아내는 통로가 되어 주었다. 힘들고 어려울 때 잠시 숨을 수 있는 동굴 같은 도피처이기도 했다. 

 

이번 신춘문예에 두 번째 투고하고 나에게 냉정히 물었다. 시를 쓸 수 있는 지적 자산과 삶에 대한 통찰력은 있는지. 정서의 유희(遊戱) 같은 감정의 사치는 없는지. 모두를 걸어 본 적이 있었는지. 모두를 걸었을 때 오는 그 외로움을 느껴본 적은 있었는지. 어느 질문에도 시원한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이러고도 시를 썼다니. 시작(詩作)을 이쯤에서 내려놓기로 했다. 눈에 갇힌 선유도에서 어쩔 수 없이 보낸 며칠이 나를 홀가분하고 후련하게 해주었다. 눈에 갇힌 지 5일 만에 군산행 배를 탈 수 있었다. 

 

지금 선유도는 다리로 연결되어 섬이면서 육지가 되었다. 올겨울 다시 그 섬에 들어가 그냥 며칠 동안 갇혀있다 오고 싶다. 50년 전과 달리 시를 쓴다는 게 내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다시 물어보고 싶다. 다시 내려놓을지, 아니면 오랜만의 수작(秀作) 한편을 건져 올는지는 모르는 일. 눈 속에 갇히면 더할 나위 없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