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산김씨 문중임을 분명히 한 행장마을 표지석에 ‘정직·근면·효행’의 마을훈이 또렷이 새겨져 있다.

 

‘광산김씨 문숙공 화평부원군 좌윤공 문중’ 행전리 행장마을을 가리키는 화살표와 함께 표지석에 새겨진 문구가 색다르다. 지방도 820호선을 따라 양산초등학교에서 반남면 방향으로 4키로미터쯤 지나면 도로 왼쪽에 우뚝 세워진 표지석을 만날 수 있다. 조선 태종 때 광산김씨 좌윤공파로 사헌부 감찰과 함평현감 등을 지낸 김미여가 영암군 도포면에서 옮겨와 터를 잡은 이래 오늘에 이르고 있는 왕곡면 행전1리 행장마을.. 마을이름은 은행나무 고목과 은행나무 정자가 있어 행동이라 불리다 해방 후 행장으로 부르게 되었다.

 

“광산김씨 종가집 장남이랑 결혼해서 1년에 열 번 넘게 제사를 지내야 했다”는 이미덕(85세) 씨는 “문중 땅 2천여평에 수박농사를 지었는데 물고랑을 제대로 내지 않는 바람에 큰 비에 밭이 잠겨서 완전히 망쳤던 적도 있다”며 “여물 대기 힘들어 팔아버린 소를 대신해 맨몸으로 논밭 열마지기 농사지어 6남매를 키웠다”고 한다. 

 

성을 따서 ‘문평댁’이라는 댁호를 직접 지었다는 문연순(91세) 씨는 “하루 밭일 하면 쌀 반되, 가마니 열장을 짜면 서너되 정도 벌어서 먹고 살았다”며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고생해서 아들 셋, 딸 셋을 키웠는데 최근에 손자가 박사가 됐다는 소식에 너무 기뻤다”면서도 ‘고생하며 살아온 삶은 생각도 하기 싫다“고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다. 

 

“결혼한 날부터 왕골농사 짓느라 눈코 뜰 새도 없었다”는 나양자(84세) 씨는 “볕이 좋을 때는 이틀이면 바싹 마르는데 비를 맞으면 빨갛게 변해서 못 쓰게 된다”며 “진흙에 묻혀 푸르스름하게 잘 말려놓으면 영산포 돗자리 공장에서 와서 사 갔다”고 한다. 영암군 시종면이 고향인 ‘시종댁’ 나 씨는 “결혼하고 와서 문연순, 이미덕 씨가 같은 고향사람이란 걸 알고 더 의지하며 친해졌다”고 밝게 웃는다.

 

▲ 함박골이라 불리는 야트막한 야산 아래 왕곡면 행전1리 행장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5남매가 모두 서울에 살고 있다는 이정자(85세) 씨는 “시골에서 고생하며 살지 말라고 도시로 내보냈는데 영감이랑 둘만 남게 되니 너무 외롭다”며 “영감이 서울로 이사 가자고 할 때엔 도시 생활이 낯설어 마다했는데 나이 들고 아프니까 후회가 된다”고 한다. 이 씨는 동강면 월량리가 고향이다.

 

동강면 대전리가 고향인 김군자(63세) 씨는 “서류 심부름 왔다가 왕곡면사무소에서 군복무 중인 남편을 만나 19세에 결혼했다”며 “지금은 과수원이 된 마을 건너편 야산에서 갈쿠나무랑 솔나무 해서 아궁이에 불을 땠다”고 기억한다. 김 씨는 “브라질의 전자회사에 다니는 딸 내외가 매년 한달씩 여름휴가를 다녀간다”고 말을 더한다.

 

“비구름만 몰려오면 먹던 밥을 뒤로 하고 달려가 거두어 들여야 했다”는 김장암(86세) 씨는 “비 맞으면 망치는 왕골 농사지을 땐 낫으로 베고 지게에 져 옮겨서 볕에 널어 말리느라 날을 새기도 하고 ‘진흙밭의 미꾸라지’ 꼴이 되기 일쑤였다”며 “왕골 벤 자리에 쟁기질하고 모 심고 피 뽑는 일을 징그럽게 되풀이했다”고 한다.

 

10여년 전 ‘트러스 구조 하우스’로 특허를 받은 신경우(62세) 씨는 “고향인 여수에서 고추, 오이 등 시설채소 농사를 짓던 중 트러스 구조로 지으면 더 오래가고 규모가 큰 하우스를 지을 수 있겠단 생각에서 특허까지 받았다”며 “보통 하우스의 2배가 넘는 폭 18m 이상 규모의 하우스 건축수요가 많은 나주에서 일을 하다 보니 정이 들어 5년 전에 아예 이사 왔다”고 한다. 신 씨는 “행장마을 사람들이 넉넉하고 포근하게 안아준다는 기분을 느끼며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덧붙인다.

 

▲ 김송백(64세) 씨는 탯자리이자 부모님이 사시던 집 터를 주민들이 쉴 수 있는 공원으로 조성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서울로 전학가서 공부하고 직장생활하며 살다 50년만인 2019년에 고향으로 돌아왔다”는 김춘남(67세) 씨는 “국악을 좋아해서 북이랑 꽹과리 등 취미활동과 함께 건강을 챙기며 여생을 즐기려 한다”고 한다.

 

으뜸농장을 운영하는 원만희(68세) 씨는 “인접한 장산리가 고향인데 1990년 귀농하면서 친구의 땅을 사서 배를 심었다”며 “여성일감갖기 사업과 연계해 우리쌀 소비 촉진의 일환으로 배를 이용한 한과를 만들어 ‘없어서 못 팔 정도’로 인기가 많았지만 일할 사람이 없어 작년 추석을 마지막으로 문을 닫았다”고 한다. 원 씨는 나주배 품종과 재배방법 등을 공부하는 ‘나주배연구회’ 회장을 맡고 있다.

 

마을회관 앞 탯자리를 공원으로 조성한 김송백(64세) 씨는 “어릴 적 추억이 깃들고 60년 넘게 부모님이 사시던 집을 방치할 수 없어 터를 다져 나무를 심고 정자를 지었다”며 “한가족이나 다름없는 주민들이 쉬고 어울릴 수 있는 공간으로 활용하는 것이 비어두는 것보다 의미있는 일이라 생각했다”고.

 

마을 출신으로 김영화 전 나주경찰서장(1995. 1~12월)이 있고, 왕곡면장으로 퇴직(1995년)한 김본현 씨와 문평면장을 지내고 이창동장으로 퇴직(2018년)한 김우봉 씨를 주민들은 ‘부자면장’이라 부른다. 초대 나주군의원에 당선돼 나주시의회에 이르기까지 3선 의원으로 산업건설위원장을 지낸 김태근 전 의원도 행정마을 사람이다.

 

주민들의 공동체 공간이던 두 곳의 샘터가 사라지고 마을이름의 유래가 된 은행나무는 흔적을 찾을 수 없어 아쉬움이 남지만, 표지석에 ‘정직·근면·효행’이라 굳게 새겨진 ‘마을훈’이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인터뷰 김형복 행전1리 이장·왕곡면 주민자치위원장

 

 

“선진국이 되면 농업으로 충분히 먹고 살 수 있다고 생각해 농수산대학에 갈 것을 권했다”

 

왕곡면 주민자치위원장 김형복(56세) 행전1리 이장은 “두 아들이 모두 한국농수산대학 과수학과를 마치고 배농사를 짓고 있다”며 “대학진학을 고민하는 큰아들에게 장기적으로 보면 비전 없는 직장생활보다 생명산업인 농사가 경쟁력을 갖게 될 것이라고 추천했는데, 그 말이 맞았다”고 자신감을 내비치며 “둘째는 자연스레 형의 길을 따르더라”고 덧붙인다.

 

경기도 부천시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한 김 이장은 “스무살 무렵엔 도시가 좋아보였다”며 “철제의자 만드는 공장에서 용접일을 배워 3년여 근무했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희망이 없었다”고.. 고민 끝에 대전으로 내려가 형이 운영하고 있는 의류소매업에 뛰어든 김 이장은 “형 밑에서 1년을 경험하고 가게를 차려 제법 자리를 잡아가던 중 IMF를 맞았다”며 “빨리 접었으면 다른 일을 했을 수도 있을 테지만, 붙잡고 있는 바람에 보증금을 월세로 까먹고 권리금도 받지 못한 채 정리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고향으로 돌아와 부모님과 함께 농사를 짓기 시작한 김 이장은 “빈 손으로 돌아온 게 허무하기도 하고 힘든 농사일에 정이 붙지 않아 상당한 시간을 방황도 했다”며 “배나무가 커가는 모습을 보며 ‘다시 힘을 내자’고 마음 먹고 나니 일이 힘든 줄도 몰랐고 청년회와 방범대 등 봉사활동도 참여하게 됐다”고 한다. “지역사회에 적극 참여하다 보니 올해부터 주민자치위원장을 맡게 됐다”는 김 이장은 “연방죽에서 연밥 따먹으며 학교 다녔던 고향이 더 살기 좋은 고장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다 할 것”이라고 의지를 나타낸다.

 

“대전에서 실패한 것만은 아니다”는 김 이장은 “첫 인상에 반해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사랑을 나눈 부인을 만난 것은 내 인생 최고의 성공”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