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채석 기행작가

여행을 다니다 보면 낡고 오래된 풍경이지만, 되레 칙칙하지 않고 보송보송한 솜이불과 같이 포근하고 따사로운 곳이 있다. 바로 충남 논산에 속한 소읍 강경과 같은 곳이다. 동안 호남선 열차를 타고 촌놈 상경기랄까. 입대영장을 받고 연무대에 갈 때, 서울을 무시로 내 집 드나들 듯 오갈 때 강경역을 지나쳤지만, 내려 보지도 내려 볼 생각도 못했다. 다만, 젓갈의 명성은 전국에서 으뜸이라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이랬던 내가 뜬금 강경에 이르고 싶었다. 강경행 무궁화호 열차표를 손에 쥐었다. 광주송정역에서 장성, 백양사, 정읍, 신태인, 김제, 익산을 지나니 역무원의 안내방송에 따라 잃어버릴 물건 없이 강경역에 내렸다. 물건이래야 달랑 손에 쥔 책 한 권이다. 거리가 편하다. 지나는 차량도, 지나는 사람도, 있는 듯, 없는 듯, 당최 드문드문하다. 대체 급할 것도 바쁠 것도 없다. 슬로시티라 부른 곳보다 더 슬로 했다.

강경상업고등학교를 생각하며 걸었다. 생전에 그렇게나 울었던 눈물의 박용래 시인이 1943년 전교수석으로 졸업했다는 기억이 떠올라서다. 강경에서 태어난 시인의 시 <마을>에서 보면 “난/채운산/민둥산/돌담 아래/손 짚고/섰는/성황당/댕기풀이/허수아비/난” 중 구름무늬를 닮은 채운산彩雲山은 강경역 뒤의 남쪽에 위치한 산으로 56.4m의 산이라기보다는 낮은 구릉과 같다. 북쪽의 강경산 옥녀봉은 44m로 더 낮다.

채운산과 옥녀봉의 낮은 산보다 더 낮은 산이 하나 더 있기는 하다. 임리정과 죽림서원, 팔괘정이 있는 강경돌산이다. 이곳에서는 강경읍을 조망할 수 있는 곳으로 팔괘정八卦亭은 우암 송시열이 지은 정자다. 이름 그대로 창살 무늬를 팔괘로 꾸며 팔괘정이다. 트이거나 열린 정자가 아니라 사방이 문으로 닫힌 정자다. 흐르는 강을 내려다보며 시를 읊거나 풍류를 즐긴 정자가 아니라, 학문에 집중하는 정자로 이해했다.

팔괘정 아래 죽림서원은 인조 4년에 세워진 지금의 사립학교와 같은 교육기관으로 대원군의 서원 철폐에 건재하지 못했다. 홍살문과 외삼문이 보인다. 공사관계로 출입이 통제되었다. 담장이 낮아 까치발을 하지 않아도 훤히 보인다. 그리고 깊은 내부는 안내문이 대신한다. 먼저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을 모셨다. 후에 사계 김장생을 배양하고, 현종 때 죽림서원 사액을 받았다. 그 이전에는 마을 이름과 같이 황산서원이었다.

다음으로 정암 조광조, 퇴계 이황, 우암 송시열의 위패를 모셨다. 그러고 보니 당대 최고의 엘리트들을 모신 곳이다. 죽림서원 옆으로는 임리정이 있다. 임리정은 죽림서원과 같이 인조 4년에 사계 김장생이 지은 정자로 학문을 닦고 후학을 지도하던 곳으로 “깊은 못가에 서 있는 것과 같이, 얇은 얼음장을 밟는 것과 같이, 자기의 처신과 행동에 늘 신중을 기하라”라는 『시경』의 굴절과 같아 임리정이라 한다.

강경에 도착해 강경역으로부터 시작된 강경 여행은 낡고 오래된 풍경, 오래 익은 숙성된 맛이 확 풍겨 왔다. 특히 강경읍 중앙리에 이르니 목포나 군산과 같이 근대의 문화를 알리는 거리에 적산가옥이나, 옛 한일은행이었으나 지금의 강경역사관 건축물이 더욱 그랬다. 특히 부산의 백재병원과 같이 붉은 벽돌을 이중으로 쌓는 화란(네덜란드)식 쌓기가 시대의 흐름을 이야기하고, 주변의 강경 구락부 분위기 역시 그랬다.

옥녀봉에 올라 말없이 흐르는 금강을 굽어보았다. 전북 장수읍 수분리의 뜸봉샘에서 시작한 작은 물줄기는 마이산의 진안, 덕유산의 무주, 인삼의 고장 금산, 추풍령의 영동, 정지용의 고향 옥천, 속리산의 보은을 흐르며 대청호를 적신다. 이어 충남 공주를 흐를 때는 웅진강이라 불리고, 부여를 지날 때는 백마강이라 불린다. 강경에 이르러서는 논산천과 강경천을 아우르며 서천과 군산 사이에서 노란 바다가 된다.

금강을 굽어보는 옥녀봉 자락에 [소금 문학관]이 자리한다. 내가 문학관을 그냥 지나친다는 건 참새가 의심할 일이다. 출입문을 밀치니 여성 해설사분이 반긴다. 대뜸 “가출을 준비하려고 왔습니다.”라며 인사드렸더니 환한 웃음을 아끼지 않는다. 소금 문학관은 이 지방 출신 작가 박범신의 작품 『소금』을 주제로 한 문학관으로 가출한 아버지를 찾아 나선 딸 시우의 이야기다. 논산과 익산 일부 등과 함께 강경이 작품의 주요 배경이다.

『소금』은 특정한 누구를 지칭하지 않을뿐더러 같은 시대를 살아왔거나 살아가는 모든 아버지들의 초상과 같은 이야기로, 가족의 틈에서 뭔가 용도 폐기된 유랑인 같은 이야기다. 거대한 소비문명의 시대를 가로지르면서 집에서나, 직장에서나, 노동력만을 희생하고 강요당했던 아버지들은 도시철도의 유랑인으로 부평초와 같이 흐르는 시대에 등은 굽고, 어깨는 좁아진 늙은 소년과 같은 아버지를 보며 남몰래 눈물 훔친 적이 있었던가.

“아. 부. 지.” 당신이 당신의 별나라로 떠난 지 30여 년 만에 마음 깊이 떠올려본다. 강점기 남의 나라 경도(교토)에서 유학할 당시 지하철 청소 아르바이트를 하며, 밤이면 친구와 지붕 사이로 보이는 별을 보며 조국을 이야기했다는 그 말이 아프다. 말이 좋아 지붕 사이로 보이는 별이지 비가 오면 빗물이 강이 되었을 환경을 생각하면 철 모르고 배불렀던 아들은 이제야 부끄러워 얼굴은 수밀도水蜜桃가 된다.

평생 교직을 외길로만 알았던 아버지를 생각하니 마음이 짜다. 그러고 보니 젓갈도 짜다. 그러한 젓갈은 강경이 으뜸이다. 날것인 생선의 알이나 살, 창자, 아가미 외에도 조개나 새우 등을 소금과 함께 숙성시킨 것이 젓갈로 알고 있다. 이러한 젓갈의 근원은 냉장고가 없던 오랜 옛날 어패류의 부패를 막고 신선도를 유지하기 위해 염장하던 것이 발전해 지금에 이르며, 하나의 맛깔나는 음식으로 각광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먹어보지 않으면 모르는 법. 식당에서 점심으로 젓갈정식을 주문했다. 갈치속젓, 새우젓, 명란젓, 오징어젓, 꼴뚜기젓, 황석어젓, 아가미젓, 낙지젓, 낙지비빔젓, 멍게젓, 어리굴젓, 청어알젓 등 무려 12종의 젓갈에 12종의 반찬과 미역국은 여행자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짤 거로만 생각했던 젓갈의 맛은 달고, 시고, 쓰고, 향기로웠다. 인생을 맛으로 비유한다면 바로 이런 맛이 아닐까.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