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용식 수필가·공학박사

아내는 유화 작가다. 매년 열리는 그룹전에 초상화 한 점을 출품한다. 에코백 제작업체에서 연락이 온다. 그 작품을 에코백에 프린팅해 판매하고 싶은데 허락해 달라는 것이다. 저작권료로 에코백 열 개를 주겠단다. 아내는 들뜬 마음으로 허락했음은 물론이다. 자기 작품이 관심을 끌어 상업화된다니 그럴 만도 하다. 가까운 지인들에게 선물하더니 파주에 사는 일본인 외숙모한테도 선물하고 싶다고 한다. 아내와 처외삼촌은 가끔 연락하고 지내는 듯하지만 나하고는 몇 차례 통화만 한 사이. 막상 만난다고 하니 부담스럽다. 이런 날 올 줄 알았으면 진즉 한 번 뵀더라면 하는 뒤늦은 후회가 든다. 서울 남부터미널 근처 식당으로 약속을 잡는다.

외삼촌은 자기 별명처럼 고릴라 같은 우람한 덩치인 데 비해 일본인 외숙모는 조그맣고 아담한 체격이다. 일본인 특유의 상냥한 미소를 잃지 않아서인지 나이보다 훨씬 젊다. 에코백을 받아들고는 너무 예쁘다며 바로 어깨에 걸치면서 좋아한다. 함께 식사하고 인사동으로 자리를 옮긴다. 외숙모가 아직 한국어가 익숙하지 않아 대화 중간에 외삼촌이 끼어들어 보충 설명을 해준다. 몇 군데 갤러리를 들러 함께 사진도 찍으며 즐거운 시간을 가진다. 외삼촌은 화제도 풍부하고 활달하여 오랫동안 익숙한 사이처럼 자연스럽게 분위기를 이끌어 간다.

그날 이후 서로 교류하며 하나둘 알게 된 외삼촌은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다. 평범한 인간의 평범 하지 않은 삶이다. 우리와 소원(疎遠)하게 지낸 이유이기도 하다. 외삼촌이 밝히기를 꺼리는 삶의 일부는 생략하고 나머지는 그의 허락을 받아 정리한다.

고등학교 때 그의 그림 실력은 특출했다. 미술 선생님이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지도한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대학 진학을 포기하자 미대 입학원서까지 준비해 놓은 선생님의 난감함과 속수무책이었을 선생님 마음을 헤아리기 어렵다. 그 소식을 들은 친구 동일이는 쫓아 와 다짜고짜 그의 뺨을 때린다. 바보 같은 녀석 어떻게 하든 도전해 봐야 하는 게 아니냐고. 재능이 많으면서도 물감 살 돈 없는 그에게 남모르게 재료를 지원해 준 친구였다. 형님이 자기에게 준 선물인데 그냥 너에게 주는 것이라면서. 나중에 밝혀진 일이지만 그 친구 동일이는 자기 용돈 모아 물감을 사주고는 친구가 부담가질까 봐 거짓말한 것이었다. 믿고 응원했던 그에게 오죽했으면 뺨까지 때렸을까. 외삼촌은 그들의 마음 써 줌을 가슴에 품고 살았나 보다. 이 사연은 오랜 세월이 흐른 후 동창 모임에서 알려지게 되고 이 내용은 모 방송국 <싱글벙글 쇼>의 ‘백일장’ 프로에 채택되어 소개되기도 한다.

일본으로 밀항을 시도한다. 그때 나이 24살. 왜 그런 무모하고 터무니없는 생각을 했는지 딱히 설명이 어렵다. 군대를 마쳤다 해도 특별한 기술이 없는 인문계 고졸자는 힘쓰는 일 외에는 마땅한 일자리가 없다. 빨리 돈 벌고 싶다는 강박감은 앞서는데 미래가 암울하다. 알고 지내던 지인이 밀항 루트를 귀띔 해주고 외항선까지 타도록 알선해 준다. 밀항에 성공할 경우 당분간 생활에 필요할 엔화와 달러를 가슴 깊이 숨긴다. 배가 홋카이도 연안 근방으로 접근하면 구명조끼를 입고 바다로 뛰어들 심산이었다. 밤 배를 타고 동해를 지나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별빛은 왜 그리 선명하게 빛나든지. 불투명한 미래가 불안하고 두렵다.

홋카이도 연안을 지나 캄차카로 향할 예정인 원양어선은 마침 태풍을 만나 일본열도에서 훨씬 먼 대양으로 피항하게 된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배 안에 수산물 가공설비를 갖출 정도의 대형 공모선(工母船)은 태풍을 만나면 태풍 영향권에서 벗어나 먼 대양으로 피항하는 게 안전하다고 했다. 내 계산은 빗나간다. 태풍이 앞길을 막는다. 나를 지키려는 신의 섭리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잠깐 스친다. 6개월 동안 공모선 안에 갇혀 잡은 명태를 가공하는 일을 한다. 다시 부산항으로 돌아왔다.

모 방송국의 드라마 공모가 뜬다. 그때 겪은 일을 글로 써서 응모하여 당선 통보를 받는다. 생생한 경험을 솔직하게 표현한 것이 PD에게 어필했나 보다. 얼마 후 방송국에서 다시 연락이 온다. 드라마보조작가 할 생각 없느냐고. 당시 보조작가 대우는 담배꽁초 줍는 수준이었다고 표현한다. 글은 계속 쓰고 싶고 돈은 필요했다. 다시 만화 대본작가 생활을 한다. 일본 만화를 도작(盜作)해 각색하라는 작가와 알력 때문에 그만둔다. 그 후로도 드라마와 시나리오 공모에 여러 차례 응모한다. 2%가 부족했는지 항상 최종심에서 탈락한다. 20대 후반이었다.

어머니는 글 쓴다며 이곳저곳 기웃거리는 아들이 못마땅하다. 이를 보다 못한 어머니는 의정부에서 조그만 건설회사를 경영하는 친정 동생에게 일자리를 부탁한다. 현장 기사 겸 잡부 일을 시킨다. 그때 기술 없이는 장래 희망이 없다는 것을 느낀다. 현장에서 매너 좋고 깔끔하게 일 처리 하는 타일공을 보고 타일 시공 기술을 배우기로 한다. 배울만한 학원도 없는 시절. 알고 있던 친구 작업팀에 들어가 도제식으로 배워 한 달도 안 돼 기술자로 나선다. 얼치기 기술자. 시행착오도 많고 그걸 만회하려 몇 배의 노력을 한다. 타일 공사는 다 지은 건물에 화장하는 일. 미적 감각과 손재주, 힘이 필요하다. 그 세 박자를 갖췄는지 기술 완성도가 높아지면서 우선 일하는 재미가 있다. 전문 기술자 밑에서 최소 2~3년 경험을 쌓아야 하는데도 곧바로 독립한다. 일감은 많았다. 이제는 일해 놓고 공사비 받으러 다니는 게 힘이 든다. 왜 이리 꼬이나. 고민이 늘어 간다. 90년 겨울에 머리도 식힐 겸 일본에 유학 중인 친구를 만나러 간다. 방학 때 현장에서 타일 공사 아르바이트를 하던 친구가 내 사연을 듣는다. 일본 타일 시공업체 입사를 강력하게 권유한다. 친구 말을 따르기로 한다. 

-다음 호에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