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용식 수필가·공학박사

군대 생활 한 번 더 한다는 생각으로 버틴 30개월. 약간의 목돈을 쥐고 귀국한다. 국내 건설 현장은 3년 전과 하나도 변한 게 없었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있지만, 나날의 생활은 일본이 한국보다 훨씬 나았다. 다시 일본으로 출국한다. 2년이 지나면서 똑같은 일의 반복에서 오는 권태, 이웃과의 소통 부재 등으로 향수병이 도진다. 어머님의 건강도 염려스럽다는 소식이 전해 온다. 어머니 병환 이유 반, 일상의 권태에서 변화를 주고픈 마음 반 등 스스로 구실을 만들어 다시 30개월 만에 귀국했다. 이후 타일 공사 일을 접고 부천에서 조그만 호프집을 차렸다. IMF의 파고는 높고 험난했다. 버티지 못하고 폐업했다. 그동안 모은 돈을 모두 없애고 나니 더욱 난감했다. 가족 없는 혼자 몸이라는 것이 다행스럽다는 생각까지 한다.

용돈 정도로 할 수 있는 일. 시나리오협회 부설 시나리오학과에서 글쓰기 공부를 다시 시작한다. 운 좋으면 두둑한 상금도 챙길 수 있다. 6개월 정도 수강을 했는데 항상 1, 2등 한다. 함께 우등을 다투던 재덕이는 꾸준히 글만 썼다. 지금은 어떤 작품이라고 하면 알만한 드라마와 영화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뒷바라지해 준 부모가 있어서 부럽고 하고 싶은 일을 끝까지 해서 성공한 의지가 부러웠다.

국내 건설경기가 바닥을 치자 마땅한 일자리 찾기가 힘들었다. 그동안 오가며 익숙해 있던 일본을 다시 떠올린다. 벌써 세 번째 출국이다. 이번에 떠날 때는 다시 안 돌아오겠다는 각오까지 한다. 부끄러워서 또 일본 간다는 말 할 처지도 못 된다.

이번에는 일본과 인연이 닿지 않았다. 일본의 건축경기 쇠락(버블 붕괴 후 잃어버린 30년)으로 일감이 줄었다. 타국에서 일정한 수입 없이 버틴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다. 타일 일을 다시 시작했다. 그런데 이런 인연도 인연이 될 수 있을까. IMF 전 부천 대학가에서 호프집 하며 쌓은 인맥(단골들이 건축과 출신이 많았음)들이 서로 일감을 연결해 주었다. 마침 한국에 건설 붐이 일어나고 일이 꼼꼼하다는 입소문이 돌면서 조금씩 안정을 찾는다.

결혼을 생각하게 된다. 선도 보고 소개팅도 했지만, 상대의 요구 조건에 많이 부족했던지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창원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는 돌싱 고교 동창이랑 둘이서 8박 10일 노르웨이 여행을 간다. 오로라를 꼭 보고 와야 하는데 좀처럼 보여주지 않는다. 오로라를 보고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데. 마지막에는 여행 기분에 마시던 술도 끊고 목욕재계하며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장소 바꾸기를 몇 차례. 어느 큰 호숫가에 차를 세운다. 안데르센 동화에서나 나올법한 아름다운 풍경이다. 호수 건너 멀리 산 위에서 신비스러운 빛이 비치기 시작하자 관광객들이 ‘와’ 함성을 지른다. 저게 오로라구나. 대 자연의 신비를 보면서 감동의 눈물을 쏟아낸다. 옆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흥분하던 중국 관광객 아가씨들도 덩달아 운다. 그러면서 두 손을 모으고 소원을 빈다. 나도 30여 년 혼자 살았으니 제발 짝 하나 만들어 달라고 간절히 빌었다. 그만 외롭게 해달라고.

평소 한류에 관심이 많아 매달 월급에서 만 엔씩을 적립해 12만 엔이 되면 한국을 찾는 일본인 돌싱 여자가 있다. 어느 날 남산을 여행하던 일본인은 도심 가까이 웅장하게 자리 잡은 북한산을 보고 한눈에 반한다. 마침 서울 관광 안내를 하던 외삼촌 후배에게 북한산 등산 안내해 줄 사람을 소개해 달라 한다. 이런 우연도 있을까. 그때 등산에 미쳐있던 삼촌의 연락처를 준다. 그 후 얼굴도 모르면서 매일 카톡으로 통화를 한다. 서로 등산을 좋아하는 공통 취미와 살아온 이야기를 나누면서 급속히 가까워진다.

김포공항에서 맨 처음 만난 날 서로 놀랬다. 여자는 남자가 고릴라처럼 너무 커서 놀라고 외삼촌은 사진과 너무 다른 외숙모의 미모에 놀란다. 오로라를 보고 간절히 기도한 것이 효험이 있었나. 만난 지 10개월 만에 우선 혼인신고만 하고 파주에 정착했다. 한국 전통 혼례복을 입고 사진만 찍었다. 신혼여행은 적금 타서 크루즈여행을 가기로 한다. 그는 초혼이고 아내는 대학생 딸과 아들이 있는 이혼녀다. 아이 둘이 있는 일본인 여자와 나이 많은 한국 남자의 조합. 걸림돌이 되리라 예상했지만, 양가 모두 흔쾌히 허락한 것이다. 밀항을 시도하고 새로운 탈출구를 찾고자 세 번씩이나 일본을 찾았는데 이는 일본인 아내를 맞이하기 위한 운명 같은 선택이었나 보다.

일본인 아내는 마라톤과 등산을 좋아하는 긍정적인 성격이다. 금방 한국에 적응하고 내조를 잘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한동안 일본에 갈 수 없게 되자 동영상을 찍어 일본의 가족들과 소통하게 되면서 유튜브를 시작하게 된다. 현장 영상 찍는 날은 남편과 함께 출근해서 타일 공사 시공과정을 남편의 설명을 들어가며 찍는다. 그리고 수다 떨며 준비해 간 도시락을 먹는다. 타일공으로 입문하려는 사람들에게 주는 팁이 많아 인기가 많다고 자랑했다.

<명랑한 일본인 아내 에미몽 Korea TV> 유튜브는 소소한 일상을 영상으로 찍고 월요일부터 영상 작업을 하여 금요일 오후 5시에 업로드 한다. 모든 작업은 아내 에미코의 몫이지만 한글 번역은 고릴라 남편이 돕는다. 지난주에 구독자가 5만 명이 넘어 자축 파티를 했단다.

지금은 타일 공사 일을 하면서도 고등학교 졸업하면서 놓아버린 꿈을 다시 키우고 있다. 수채화 도구를 준비해 첫 작품으로 그린 골목길을 보여주었다. 틈틈이 써 놓은 시나리오가 열 편 가까이 된다고 했다. 그의 포기를 모르는 이러한 에너지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언젠가 수채화 개인전을 보러 갤러리를 들르고 시나리오는 극장에서 만나는 날이 기다려진다.

‘우리 인생은 기준이나 정답이 없다. 매 순간 어떤 선택을 하느냐가 바로 인생을 결정짓는 것이다. 그 선택의 순간이 모여 삶이 된다.’라는 어느 분의 글이 떠 오른다. 지극히 당연한 듯한 이야기이면서 ‘선택’이라는 단어를 다시금 되새겨보며 그 무게를 실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