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말에 피식 웃었다. ‘불목견불佛目見佛이고 저안시저猪眼視猪’라 했던가. 흔히들 말하는 부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모두가 바르게 살아가려는 부처로 보이고, 돼지의 눈으로 보면 먹을 것에 한 치 양보도 없는 돼지로 보인다는 것으로 사람은 저마다 그릇의 크기를 모르고 모든 기준을 자신의 정도에 맞추려는 경향이 크다. 이는 시대를 뛰어넘어도 변함이 없는 고전 읽기를 즐기는 사람에게 삼류소설을 읽으라는 건지. 아니면 우리 가곡을 애창하는 사람에게 트롯을 부르라는 건지.

 

아무튼 10⸳ 4⸳ 4로 기억하는 의미의 숫자가 있는데 무슨 거창하거나 특별히 기억해야 할 날은 아니다. 그렇다고 화투장의 숫자도 아니다. 무슨 길이를 나타내는 것도 아니다. 더군다나 밸런타인데이니 화이트 데이니 하는 흔해빠진 딴 나라의 기념일도 아니다. 다만 나에게 있어서 얼굴이 수밀도水蜜桃와 같이 붉어질 정도로 부끄러운 숫자임에는 분명하다. 이를 실타래라 여겨 풀어서 말하면 우리나라 국민 10명 당 4명은 1년에 冊을 한 권도 읽지 않으며 4명은 도서구입을 한 권도 안 한다는 숫자다.

 

이렇듯 독서가 생활화되다 보니 이제는 손에 冊이 없으면 무언가를 잃어버린 거와 같이 허전하고 이상하다. 다만 주변의 누구에게도 冊을 읽으라고 권하지는 않았다. 이는 사람으로 태어나 누군가에 의한 구속보다는 스스로 원칙을 정하고 행하는 자율이 중요하듯이, 보다 사람답게 사는 데 있어서 자신의 가치를 존중하는데 독서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는 의식과 함께 책임이 병진되어야 한다고 생각만 하는 까닭이다. 만고에 변함없는 진리와 지혜의 길이 거기에 있다고 굳게 믿으니까.

 

그만큼의 독서 습관으로 인해 뜻하지 않게 만난 서도역은 마침 최명희 선생의 미완성 대하소설 『혼불』 10권 중 6권을 읽고 있던 터라 더욱 그랬다. 동안 冊을 읽고 나서 그 문학의 배경이 되는 곳을 더러는 가 보았지만, 읽던 도중에 가보리란 생각은 추후에도 해본 적이 없다. 우연을 필연인척 가장할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마음이 아팠었다. 이유는 『혼불』이라는 문학의 주요 배경이며 대문과 같은 곳이 폐역이라는 이름으로 옛 역과 터를 철도청에서 일반에게 공매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심경으로 마치 시골 분교의 교실 한 칸 남짓이나 되는 옛 역사를 값싼 동정과 연민을 담은 눈으로 하염없이 바라다보았다. 늘 새로운 것만을 찾는 현실이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지만, 왠지 버려진다는 비참함은 남의 일이 아닌 우리네 인생과 같은 것은 아닐까 싶었다. 제아무리 가진 게 많고, 배움이 많아도 떠날 때는 빈손이라는 사실을 생각할 때 누군가의 가슴에 따뜻한 이름 하나로 기억되지 않는다면 버려진 것만도 못한 존재라는 생각이 드는데 공매라는, 처분이라는, 아픔이 매우 컸다.

 

다음에 『혼불』 10권을 모두 읽고 다시 옛 서도역을 찾아갔다. 문을 연 이래로 2002년 10월의 70이라는 나이 동안 숱한 승객들과 함께했던 아득한 기억을 남겨두고 이제는 승객도 역무원도 없는 무용지물이 되었어도 향수 어린 시골 역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것과 철거될 운명에서 벗어난 것을 위안으로 삼았다. 비로소 가벼운 마음으로 역에서 가까운 노봉마을로 향했다. 바로 『혼불』 문학의 탄생지이며 같은 이름의 문학관이 청암댁에 의한 청호저수지 옆에 자리하고 있었다. 

 

청호碃浩는 청암碃菴댁의 택호에서 이름하고, 우리나라 문학관을 이야기하자면 통틀어 문학가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또한 문학가 작품의 제목을 사용하는 곳은 대표적으로 이곳 남원시 사매면 노봉마을의 ‘혼불 문학관’과 넓은 들이 펼쳐진 징게 맹게 김제의 ‘아리랑 문학관’, 떼다리 벌교의 ‘태백산맥 문학관’, 주왕산으로 이름하는 경북 청송 진보에 ‘객주 문학관’, 충남 논산 강경에 ‘소금 문학관’이 있고, 전남 나주 영산포에 문순태 선생의 대하소설로 ‘타오르는 강 문학관’이 개관을 했음이다.

 

여기에서 조정래 선생의 『아리랑』과 『태백산맥』은 한 작가 작품의 문학관이 두 곳에 있는 것도 기록이지만, 최명희 선생은 별도로 전주 한옥마을에 선생의 이름을 사용한 ‘최명희 문학관’이 따로 있는 것도 기록이다. 또한 최명희 선생의 호적에는 남원시 사매면 서도리에서 태어난 곳으로 기재되어 있지만, 가족에 의하면 부친이 전주로 이사한 이후 1947년 10월 10일 전주에서 출생했다고 한다. 이러한 선생의 부친은 현해탄 건너 동경교대에 유학했던 당대의 엘리트였다고 한다. 

 

어머니는 보성 득량면 출신인 재야의 사상철학자이자 한학자인 허환許晥의 장녀였다. 최명희 선생은 2남 4녀 중 장녀로 전주의 기전 여고 졸업 후 전북대 국어국문학과에 편입,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쓰러지는 빛』으로 당선, 1974년부터 1981년까지 서울 보성여자 고등학교에서 국어교사로 재직했지만, 『혼불』 집필을 위해 교사직을 사임했다. 마치 12척의 판옥선으로 수많은 왜군의 배를 맞이하겠다는 거와 다름이 없다. 결과, 1988년부터 1995년까지 신동아에 무려 7년 2개월 동안 연재되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