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엔 임금에게 쓰는 물건이 따로 있었다. 임금이 쓰는 말도 따로 있었다. 대부분 잘 알 듯이 임금이 앉는 자리는 ‘용상, 옥좌’라 불렀고 임금이 입던 정복은 ‘곤룡포’라 했다.

임금이 타는 수레는 ‘용가’, 배는 ‘용주’, 얼굴은 ‘용안’, 눈물은 ‘용루’라 했으며 임금이 어디 나들이 가는 일은 ‘거동’이 아니라 ‘거둥’이라고 했다.

말만 다른 게 아니라 글도 달랐다. ‘임금이 능에 거둥하는 일’은 ‘능행’이라고 했는데 ‘陵行’ 대신 ‘능행(陵幸)’으로 썼다. 그래서 서울 청계천 복원 구간에 길이 186m짜리 도자 벽화로 만들어진 그림 이름도 <정조대왕 능행 반차도(正祖大王 陵幸 班次圖)>이다.

대통령에게 ‘각하’라고도 하지 않는 요즘에야 이렇게 특정인에게만 따로 쓰는 말법에 대해 거부감을 느낄 수도 있겠지만, 당시로서는 그게 ‘생활’이요, ‘말법’이자, 바로 ‘법’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런 왕조시대의 유물이 물건이라면 돈이라도 되겠지만, 그리하여 오로지 돈이 전부인 이 시대에 큰 재산이 되겠지만, 아쉽게도 이 유물은 ‘말’이다. 바로 ‘옹립’이나 ‘독대’ 같은….

옹립은 ‘임금으로 받들어 모신다’는 말이고 독대는 ‘벼슬아치가 다른 사람 없이 혼자 임금을 대하여 정치에 관한 의견을 아뢰된 일’을 가리킨다. 그러니 ‘회장으로 옹립하다’나 ‘당 대표와 독대를 하다’ 같은 말이 얼마나 엉터리인지는 쉽게 알 수 있다. 비유라면 모르되 정색을 하고 쓸 말은 아닌 것이다.

지금은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시대, 곧 국민이 곧 권력의 주체인 시대이니 이제 왕조시대의 유물은 뒷방에 고이 모셔도 될 일인 듯 싶다.

(이진원의 ‘우리말에 대한 예의’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