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 망
"공장을 학교로 돌려주겠다"

일본의 패망과 함께 한국은 해방되었다.

고국이 해방되자 200만에 달하는 재일동포들은 저마다 귀국길을 서둘렀다. 징용과 징병으로 일본에 끌려왔던 청년들을 비롯해 일자리를 찾아 고향을 등졌던 사람들까지 너나없이 부두로 몰려들러 고국으로 가는 배편에 올랐다.

해방이 되었지만 의식주를 해결할 방도가 막연했던 당시의 조선 사정을 감안한다면 무모한 귀환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만큼 조국의 해방에 대한 바람이 컸고, 이국 땅 일본에서 저마다 고생에 진저리가 났기 때문에 고향을 선택하였다.

 한편 일본 내에서는 전쟁이 종료되고 연합군이 진주하면서 기업의 목을 죄던 정부의 간섭은 대다수 철회되었다. 공업계에선 더 이상 군수품을 만들라는 협박성 요청이 없어진 것만도 큰 다행으로 여겼다.

 패전국 일본의 물가는 하루가 다르게 치솟았으며, 실업 인구는 5백만을 넘어서고, 여기저기서 파업이 쇄도하였다. 그럼에도 일본인들은 저마다 이때처럼 자유와 해방감을 느낀 적이 없었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하곤 하였다. 군국주의 정부의 통제와 억압에 시달리던 일본인들은 그제야 개인의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실감했던 것이다.

자유 다음의 문제는 의식주의 해결이었다. 일본인들은 실제 생활에 필요한 용품 중에서도 당장 몸을 가릴 옷감이 부족했다. 거리를 지나는 사람을 살펴보면 대개가 10여년 이상씩 입어온 낡고 해진 옷을 입고 있었고, 군복을 개조한 검은 물감을 들인 옷이라도 입었으면 그래도 형편이 나은 축에 속했다.

나고야에서 공장을 운영하던 서상록은 이런 점을 간파하고 방직 공장을 운영할 생각을 하였다. 전쟁이 끝나고 나면 어차피 생필품에 대한 욕구가 폭발할 것이라고 내다본 서상록은 전쟁이 끝날 무렵부터 몇 안 되는 방직공장을 돌아보며 운영 실태와 기술을 눈여겨보던 중 당시 한창 인기를 모으고 있던 나일론 섬유에 관심을 가졌다.

나일론 섬유는 1939년 듀퐁사에서 발명한 이래 인류의 의생활에 일대 혁신을 가져다준 섬유의 총아였다. 당장 입을 것이 부족한 서민들에게는 질기고 세탁이 간편한 이 섬유가 그야말로 꿈의 의류 소재였다.

다만 일본의 장래가 어디로 향할지 몰라 상록은 새로운 사업에 뛰어들기 어려웠으므로 이런 저런 소식에 귀를 기울이고만 있었다.

일본의 패전 직후 상록은 위궤양으로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실로 오랜만에 편안한 병원 침대에서 몸을 추스르고 있으면서 기존 사업을 정리하려는 구상 중에 색다른 생각 하나를 끼어 넣었다.

 다시 독립을 하자면 우선 요시다 제철과의 인연을 청산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러자면 공장부터 자진 철수해야 하는데, 고소리의 공장 터는 예전에 소학교가 있던 자리였다. 

상록은 그 학교를 수리해 주민들에게 돌려주기로 마음먹었다.

학교를 주민들에게 돌려주기로 마음먹고 있던 차에 고소리 읍장이 병원으로 찾아왔다. 한참을 머뭇거리던 그는 초등학교를 돌려달라는 말을 어렵고 힘들게 꺼내놓고는 상록의 눈치를 살폈다. 

"학교를 돌려주는 것은 물론 이참에 말끔히 수리를 해서 당장이라도 학생들이 공부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추어 주겠습니다. 공사는 내가 병원에서 나가는 즉시 직접 지휘하겠습니다"

 상록의 말을 들은 읍장의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금방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그러더니 연거푸 고개를 숙이며 말씀만으로도 고맙다고 사례를 하며 물러갔다.

읍장으로부터 설명을 전해들은 의회 의원들은 한결 같이 고개를 저었다.

"믿을 수 없다. 이미 나라가 망한 터에 다른 사람도 아닌 조선인이 그런 일을 해줄리 있겠는가? 분명히 읍장이 잘못 들었거나 필시 뭔가 다른 뜻을 숨긴 제안일 것이다"

혹시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닌가 싶어 다급해진 읍장은 몇 번이나 병원으로 찾아왔다.

그리고서는 공사방법이며, 일정, 새로운 시설물 등에 대하여 꼬치꼬치 물으며 상록의 의사가 진심에서 나온 것인지를 확인하려 들었다.

상록은 그때마다 부드러운 말로 그를 안심시켰다. /다음 호에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