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나라 살림 형편입니다'
푼돈 주며 광목 20만필 구입 요청

상록은 도깨비에 홀린 기분이 되어 방금 전 대통령 앞에서 임무를 자임하고 나서던 사람들의 태도와 내가 한 약속을 곰곰이 되짚어 보았다.

일은 해야 하는데 책임 질 사람이 없는 것이다. 그런 사정이 손에 쥘 듯 확연하게 들여다보였다. 경무대에서 물러나와 숙소로 돌아오자 채 30분이 지나지 않아 곧바로 구매처로 와달라는 전갈이 왔다.

구매처로 찾아가니 김우평씨는 난처한 표정으로 상록을 바라보며 말했다.

“각하께 약속을 하신 것으로 압니다만 우리로선 계약금이 없어 당장 계약을 할 수가 없습니다. 놀라셨겠지만 이게 나라 살림 형편입니다. 설령 계약금이 있다 한들 국내에서 생산되는 양으로는 도저히 채울 수도 없는 형편입니다. 도와주십시오.”

일은 갈수록 아리송해졌다. 그 말을 뒤집어 보니, 계약금은 없는데 계약은 해야 하고, 계약을 하더라도 나라 안에서 구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결국 상록이 일본에서 거듭 귀국해달라고 요청한 까닭을 알 수 있었다.

상록이 대답을 하지 않자 구매처장이 초조한 얼굴로 두 손을 비비며 다음 제안을 내놓았다.

“그렇더라도 최소한 계약금만은 마련해드리겠습니다. 대통령 각하를 만나 뵙는 자리에 배석했던 조선은행의 최총재에게 전화를 걸어놓았으니 그리 가보시죠.”

조선은행은 현재의 한국은행의 전신이다. 총독부 재산을 관리하던 조선식산은행의 업무를 물려받아 독립 정부의 자금 출납을 담당하고 있었다.

어쩌자는 예긴지 속까지야 알 수 없었지만 상록은 그 즉시 구매처에서 내준 차를 타고 조선은행으로 최순조 총재를 찾아갔다.

최총재는 상록을 만나자 우선 20만환을 내주겠노라고 했다.

그러면서 덧붙이기를 그만한 돈은 해방 후 조선은행이 들어선 후로는 가장 큰 돈을 내주는 것이라 했다. 하지만 그 정도 금액으로 광목 몇 십 만 필을 마련한다는 건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미 정부의 자금 사정이나 일의 전말을 어느 정도 파악한 다음이라 상록은 순순히 그 제의를 받아들였다.

약속된 20만환은 이틀인가 사흘 만에 상록의 수중으로 넘어왔다. 그것이 계약금 인 셈이었고 그것으로 상록은 정부와 계약을 체결한 당사자가 된 셈이었다.

하지만 상록이 그 돈을 받아 쥐고 일본으로 돌아오자 이천 방직 간부를 비롯해 입 달린 사람은 저마다 한마디씩 했다. 일본 현지 가격으로 20만환은 상록이 납품키로 한 20만 필을 사기에는 어림도 없는 액수였다.

더구나 방직공장이 우후죽순격으로 건립 중인 일본에서조차 그만한 물량을 구하기란 지극히 어려웠다. 그 역시 전후 복구사업에 열중하던 일본에서 옷감을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려웠음은 앞 장에서 이천 방직의 옷감이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는 사실이 이를 반증한다.

주위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절대 혼자서는 그 물량을 채울 수 없노라고 단언했다. 개중에는 왜 이득도 남지 않는 일을 무리하게 추진하느냐고 근심해주는 사람도 있었고 그 일로 엉뚱한 속셈을 챙기려는 게 아니냐고 의심하는 사람마저 있었다.

그러나 상록은 그들 앞에서 자신있게 말했다.

“이건 조국의 대통령, 국민과 한 약속이요. 하다 안되면 배를 가르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해보이겠소.”

다른 생각이 없었다.

오직 ‘이로운 것을 보면 의를 생각하고 위급한 일을 보았으면 목숨을 바치며, 오랜 약속을 평생토록 잊지 않는다면 또한 가히 성인이 될 수 있으리라 ’던 옛어른의 말씀만이 뇌리를 감돌았다.

상록은 우선 옷감 만드는 원료를 배급하던 통산성으로 달려갔다.

그리곤 이런 저런 연줄을 동원해가며 담당 관리를 만나선 부족한 대금으로 메울 터이니 일을 성사시켜 달라고 호소했다.

그간의 높은 매출 실적과 축적해둔 신용이 있었으므로 상록의 호소는 어느 정도 통했다.

하지만 막상 납품 날짜가 닥쳐오자 통산성이 확보해준 원료만으로는 현물을 만들어내기까지 시간이 촉박했다. 이천방직 출하 창고에 쌓아둔 완제품을 모조리 꺼내고 공장을 24시간 풀 가동 해도 여전히 10만 필 정도가 부족했다.

상록은 방직업에 종사하는 공장주들을 찾아가 사정을 해가며 웃돈을 얹어주고 광목을 사들였다.

그렇게 해서 드디어 20만 필에 달하는 광목을 배에 실어 한국으로 보내는 데 성공했다.

실제도 계약금의 몇 천 배나 되는 돈이 들어가긴 했지만 상록은 개의치 않았다.

일본에서 배급되어야 할 옷감이 일본인들보다 휠씬 더 춥고 배고픈 지경에 놓인 우리 동포들에게 돌아간다는 사실만으로 가슴이 뿌듯했다.

드디어 상공부로부터 물건을 잘 받았다는 회신이 왔다. 그제서야 상록은 절로 긴장이 풀리며 한숨이 나왔다.

때마침 신성모씨가 주일대표부의 공관장이 되어 동경으로 왔다. 그는 대통령의 당부라며 상록에게 귀국을 종용하던 사람의 하나였다.

그를 만난 자리에서야 ‘죽을 고생 했다’고 저간의 사정을 털어놓았다.

그제서야 사정을 알게된 신씨는 ‘그렇게 될 줄 몰랐다. 할 말이 없다.’며 위로했다.
얼마 후 한국에서 온 정부 인사 한사람이 상록을 찾아오더니 대통령께서 안부를 묻더라는 말을 전했다. 그와 함께 다시 들어오기를 바란다는 대통령의 간곡한 부탁을 전했다.

일단 일을 성사시킨 다음이었으므로 상록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한국 방문길에 올랐다. /다음 호에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