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희

반년 만에 들른 딸아이 집은 아수라장이었다. 대문을 열자 눈앞을 가로막는 빈 종이상자들이 즐비하다. 그 순간, 마음속으로부터 수많은 비난들이 쏟아져 나왔다.
 
 ‘아이고, 이 꼴이 뭐냐? 네가 개 새끼냐 소 새끼냐?’
 
하지만 무슨 말을 할 수 있으랴.
 
“혼자서 직장생활하고 학교 다니느라 얼마나 힘들었니?
 

▲ 박상희

그 말을 던져놓고 빈 상자들을 차곡차곡 정리했다. 재활용은 재활용대로 쓰레기는 종량제봉투에 넣어 쓰레기장으로 옮겼다. 딸아이는 밀린 빨래를 주섬주섬 분리해서 세탁기를 돌렸다. 자기가 보기에도 더러웠는지 고무장갑을 끼고 코를 막으며 긴 솔로 변기 안을 씻고 있었다. 나는 못 본 척 물걸레를 꾹 짜서 먼지가 수북한 방바닥을 닦아냈다. 그렇게 두 시간가량 치우고 나니 방안이 말끔해졌다. 그때서야 저녁밥을 먹었다. 반찬이라야 고작 구운 김에 깻잎장아찌, 두부찌개가 전부였지만 꿀맛이었다. 처음엔 저녁생각이 없다던 딸아이도 이마에 송골송골 땀방울을 흘려가며 두 그릇이나 비웠다.
 
다음 날, 새벽같이 일어나 이불빨래를 해놓고 딸아이는 출근하고 나는 서울역으로 향했다. 혼자 가는 내가 못 미더운지 지하철 노선을 몇 번이고 일러주었다. 딸아이 집에 올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나는 매번 서울이 낯설다.
 
서울이라는 공간에 도착해서보면 내 얼굴이 가장 새까맣게 생각된다. 밝은 라이트 1호 화운데이션으로 큰 바위 같은 얼굴에 허옇게 분칠을 했어도 그렇게 보인다. 무심코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초리에서 ‘너는 시골에서 금방 입성 했구나’ 라고 말하는 것 같다. 나는 기가 팍 죽어서 자꾸만 고개를 땅으로 떨어뜨린다. 집에서 나올 땐 꽤 세련된 무늬의 가방으로 골라 아이에게 줄 반찬을 담아왔다. 그런데 서울에서 보면 왜 그렇게 추레하게 보이는지 모른다. 비닐 팩으로 대여섯 번씩 포장을 했어도 반찬냄새가 난다. 내 코에서는 김치와 깻잎장아찌, 멸치볶음까지 모두 홍어냄새로 통일되어 버린다. 참  신기하다.    
 
그리고 나는 매우 아둔한 사람이다. 딸아이가 우려했던 것처럼 왜 그렇게 지하철 노선을 헷갈려 하는지 모르겠다. 서울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환승역인 사당역에서 노선을 바꾸어야 하는데 정반대 방향으로 탄 모양이다. 서너 정거장만 가면 된다고 했는데 중간에서 갈아타면서 또 잘못 탔나보다.
 
몇 시간동안을 빙글빙글 서울 땅속을 돌고 있는 셈이다. 지하철 벽에 붙여진 노선을 보고도 서있는 사람들에게 몇 번식 묻고 또 물었다. 한 학생이 아주 친절하게 가르쳐주었다. 고마우면서도 속으로 또 의심을 했다. 전혀 낯선 사람인데도 손수 길을 건너서 내가 지하철 타는 걸 보고서야 환한 미소를 머금으며 되돌아섰다. 휴, 안도의 한숨이 나온다.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딸아이 방이 더럽다고 흉봤던 자신이 그렇게 부끄러울 수가 없었다. ‘아이고, 박상희 너나 잘 하세요’
 
그 순간 우리인생도 지하철을 갈아타듯 길을 마음대로 바꿀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 그날처럼 좋은 사람을 만나 뜻밖에 훈훈한 정을 느낄 수 있지 않겠는가.
 
지하철은 설사 실수를 해서 길을 잘못 간대도 다시 되돌아올 수 있으니 다행이지 않는가. 한나절을 지하철 속에서 갈팡질팡하던 시간이 그래도 헛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방이 좀 어질러졌으면 어떠랴. 천천히 하나하나 치우면 될 것이고 길을 잃고 또 헤매면 또 어떠랴. 다소 느리지만 자신이 갔던 길을 다시 되돌아오면 될 것이다. 모든 잘못된 실수가 자신이 원하는 진정한 인생을 찾아가는 과정인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