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용식 수필가·공학박사

예술가들의 고뇌는 무엇일까. 자기만의 독특한 세계를 구축하여 인정받고 싶은 열망과 이 과정에서 자신과 가족을 책임져야 하는 현실적 문제 사이에서의 딜레마가 아닐까 싶다. 예술로서 자기 세계를 완성하고 상업적으로 성공하고 싶은 것은 모든 예술가의 공통된 꿈일 것이다. 평생 한 점의 그림만을 팔고 세상을 떠난 고흐가 있는가 하면, 예술 마케팅으로 엄청난 성공을 거둔 앤디 워홀도 있다. 그러나 지난 11월 유럽 미술관 기행을 떠나기 전, 인터넷과 유튜브 등을 통해 자료를 수집하다 한 작가를 주목했다. 그가 아르느보의 거장이라 불리는 체코의 ‘알폰스 무하’(1860-1939)이다. 그의 작품에 관심도 있었지만, 다른 예술가들과 비교되는 그의 삶에 더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

11월 프라하의 오후 녘은 우중충하고 쌀쌀했다. 대로변 빌딩 1층에 있는 ‘알폰스 무하 미술관’은 규모가 작아 갤러리 같았다. 좁은 공간에서 작품을 집중해서 보니 서로 대화를 나누는 느낌이다. 다채로운 꽃문양이 여인을 감싸고 은근히 미소짓는 여인들의 곡선미가 아름답다. 우아하고 관능적이다. 간결한 선과 같은 듯 다른 작품 등을 보며 석판화로 어떻게 이런 표현이 가능했는지 궁금하기까지 하다. 자료에서만 보았던 ‘지스몽다’, ‘황도 12궁’ ‘4계’ 등의 실제 작품 앞에 서 있다는 현실이 행복했다. 그의 마지막 역작 <슬라브 서사시>를 볼 수 없어서 아쉬움이 컸다. 그의 작품을 뒤로하고 그는 어떤 삶을 살았는지 쫓아가 본다.

“이 그림 네가 그린 거니?” 무하의 목걸이에 노리개로 연필을 달아 준 엄마가 깜짝 놀라 물었다. 무하는 눈만 껌벅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덟 살 나이의 무하가 아빠나 엄마, 꽃 그림이 아닌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그린 것이다. 인체의 비례와 음영까지 섬세하게 표현한 믿을 수 없는 수작이었다. 그런 그도 프라하 미술아카데미 면접에서 “다른 직업을 찾아보아라.”라는 말을 들었지만 포기하지 않는다.

“내가 도와줄 테니 본격적인 미술공부를 하지 않을래?” 코헨 빌라시 백작의 후원으로 뮌헨 미술원에서 정식으로 미술을 배웠다. 후원이 끊기자 그는 파리로 갔다. 파리는 예술의 천재들로 넘쳐났고 무하는 그중의 한 명일 뿐이었다. 잡지에 삽화를 그리고 표지디자인을 했다. 극장의 무대장치를 하며 생계를 꾸려야 했다. 이번에는 인쇄소에서 교정 일을 얻어 크리스마스 휴가도 마다하고 끊임없이 디자인과 인쇄 기술에 매달렸다.

“사장님 계세요?” 크리스마스이브에 프랑스의 유명한 연극배우 ‘사라 베르나르’의 매니저가 인쇄소를 찾아왔다. 베르나르는 연극이 흥행에 실패하자 새로운 연극 포스터를 만들려고 했다. 다음 공연까지 시간이 촉박했다. 연말 크리스마스 시즌이라 모든 인쇄소가 문을 닫았지만 유일하게 문을 열고 있었던 이곳을 찾아온 것이다.

“제가 만들면 안 될까요?” 인쇄소에서 교정을 보는 직원의 대답이었다. “자네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 일이 ‘알폰스 무하’에게 맡겨 졌다. 그동안 쌓아왔던 무하의 잠재력이 연극 ‘지스몽다(Gismonda)’의 포스터로 탄생했다. 다양한 색상의 아름다운 꽃과 부드러운 여인의 곡선, 폭 1M에 1M를 이어붙여 2M의 기다란 포스터에 사라 베르나르의 전신을 표현했다. 그때까지 보지 못했던 새로운 개념의 포스터였다. 매니저는 너무 파격적이라 난감했지만, 베르나르는 지극히 만족해했다.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시내 곳곳에 붙여놓은 그 포스터가 밤사이 모두 없어진 것이다. 포스터가 너무 아름다워 시민들이 떼어가 버린 것이다. 연극 ‘지스몽다’는 흥행에 성공하고 무하는 전속 포스터 작가로 계약하게 된다. ‘크리스마스의 기적’이라 불리는 이 사건은 무하를 꽃길로 데려갔다.

무하는 자신을 브랜딩하는 감각이 뛰어났던 것 같다. 상업 작가로서 시장의 요구를 꿰뚫고 자신의 예술 세계와 접목하여 새로운 소비를 만들어냈다. 기존 광고에는 볼 수 없던 아름답고 독창적인 모티브 등으로 소비계층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삽화와 포스터는 물론, 술과 담배, 이유식, 과자, 향수, 자전거 등 산업 전 분야에 광고 수요가 쏟아졌다. 자신의 예술 세계와 소비자 요구 사이에서 타협할 줄 아는 작가였다. 상업예술의 성공으로 부와 명예가 뒤따랐다.

1905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마지막 꿈을 이루기 위해 미국의 백만장자인 찰스 크레인과 인연을 맺고 그에게서 후원을 약속받았다. 비즈니스 능력도 있었나 보다. 1906년 자신보다 19살 어린 체코 처녀이자 미술학도인 ’마루슈카 히틸로바‘와 결혼했다. 1910년 프라하로 돌아와 항상 슬라브계의 긍지를 간직하고 있던 무하는 정부와 국민을 위해 재능과 경제적 기부를 시작했다. 프라하 시립회관 개조공사와 우표, 지폐 및 국가 휘장을 무상으로 디자인하였다.

무하는 찰스 크레인의 후원으로 1000년이 넘는 슬라브 민족의 신화와 역사를 그리는 일을 시작했다. 2년 동안 슬라브 민족을 찾아 역사와 삶의 자료를 수집했다. 이후 20년 가까이 ’슬라브여 영원하라‘를 포함한 대규모 역사화인 <슬라브 서사시> 20편을 제작했다. 이 작품들은 무하의 석판화 작품과 다른 순수 회화 작품으로 대작들도 많았다.

1928년, ’슬라브 찬가, 인류를 위한 슬라브인‘의 마지막 작품이 끝나자 체코슬로바키아 독립 10주년을 맞이하여 프라하시에 공식적으로 기부하였다. 이 작품들로 민족주의적 정서를 품은 순수 미술 화가로 명성을 쌓을 수 있었으며, “예술은 인류에게 봉사하여야 한다.”라는 자신의 마지막 꿈을 이루어냈다.

무하는 1939년 독일 게슈타포에 당한 고문 후유증으로 79세로 숨지기 전까지 민족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다. 나치 독일은 가족들만의 장례를 치르도록 통제했으나 10만의 구름 인파가 몰려 그의 가는 길을 배웅했다.

부와 명성, 자신의 마지막 소망까지 이룬 ’알폰스 무하‘는 프라하의 별이 되었다.

※ 필자 사정으로 이번 호를 마지막으로 연재를 끝냅니다. 그동안 성원해주신 독자들, 지면을 할애해 주신 이철웅 국장님과 관계자 여러분께 감사드리며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