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용식 수필가·공학박사

“일식집을 접고 빚에 허덕이고 있었다. ㅇㄱ가 무슨 정보를 얻었는지 ‘따이공’ 일을 해보자는 거야. 처음에 홍콩을 대상으로 시작했는데 자기는 체질에 안 맞는다고 중간에 발을 빼고 나만 남았어. 하늘에서 바다로 방향을 돌렸지. 평택항에서 밤 배를 타면 다음 날 새벽 중국 영성 항이나 엔타이 항에 도착해. 현지 거래처에서 건네주는 물건을 받아 그날 밤 다시 배를 타. 다음 날 아침에 평택항에 도착하면 거래처 사장이 기다리고 있어. 물건을 넘겨주고 심부름 값을 받는 거지. ‘따이공’의 90% 정도가 이 일을 해. 그 당시 한 번 다녀오면 10만 원 정도를 받았으니까. 마땅한 일자리가 없는 5, 60대가 할 일은 없고 건강하면(무거운 짐을 옮겨야 하니까) 소일거리로 그만한 벌이도 없어.” 대강의 일은 짐작으로 알 수 있겠다. 그렇게 해서 어느 세월에 빚 갚고 돈 모으지?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국제항로가 있는 항구에는 출입국관리와 세관, 검역소 등에 국정원, 경찰 등 기관원들이 상주하고 있어. 이 기관에 근무하는 누군가(상위직일수록 좋다)와 돈독한 관계를 맺고 있으면 돈 되는 일이 많아. 세상은 여기저기 다 마찬가지야. 이때 수익금 배분을 잘해야 수명이 오래가. 지금은 얼마나 변했는지 모르겠다만. 그 세계에도 소설 같은 일들이 많이 일어나더라. 오늘은 맛만 보고 좀 더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에 술 한잔 사면 해줄게”

“네 ㅂㄹ엄마 얘기 좀 들어보자. 너 결혼할 때 스토리도 직접 듣고 싶고.”

“무역회사에 다닐 때 갓 여고를 졸업한 ㅂㄹ엄마가 인턴사원으로 입사했어. 눈이 번쩍 떠지더라. 선한 인상에 귀티까지 났어. 누가 그러데. 사랑은 교통사고처럼 느닷없이 온다고. 세심한 것까지 신경 써 주며 적극적으로 대시했지. 나를 남자로 의식한 것인지, 그냥 친절한 직장 상사로서 고마움이었는지 모르지만 가까워졌어. 어머님께 말씀드렸더니 금방 얼굴에 화색이 도셨어. 외아들이 곧 서른이 되는데 얼마나 반가웠겠어. 고향 부모님께 인사드리러 갔지. 3남 7녀의 대가족 막내딸로 화목한 집안이더라. 나는 홀어머니에 외아들, 아홉 살이라는 나이 차이는 결코 좋은 조건이 아니잖아. 예상은 했지만 반대가 매우 심했어. 나를 못 만나게 하려고 직장을 그만두게 하고 마지막엔 밖에 못 나가게 삭발까지 시켜 집 안에 가둬버렸어. 결국, 담 넘어 우리 집으로 도망쳐 와 버린거지. 무엇이 그런 강단을 생기게 했는지.” 밝았던 얼굴이 어두워진다. 어떻게 맺은 인연인데 생각만큼 삶이 풀리지 않은 자기 연민 때문이어서인가.

“내가 ‘따이공’ 생활 2년 남짓했을 때, ㅂㄹ엄마까지 합류했어. 반듯한 아내의 태도 때문인지 주변에서 많이 도와줬어. 점점 수입이 늘어나더라. 6년 정도 함께 배를 탔지. 그 후 나만 남고 ㅂㄹ엄마는 남대문 시장에 조그만 가게를 열었어. 주로 ‘따이공’을 통해 들어온 중국산 제품을 팔았지. 눈썰미 좋고 반듯한 매너 때문인지 자리를 잡아가더라. 둘이 번 돈으로 남은 빚을 갚아나가면서 희망을 찾을 수 있었어. 그러나 운명은 참 짓궂더라. 코로나가 세상을 꽁꽁 묶어버렸지 뭐야. 다시 손들고 말았어. 밀린 임대료와 재고 등으로 그나마 벌어놓은 것 그대로 날려버렸지. 한동안 넋 놓고 있던 아내가 이번에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다시 일어서더라. 평소 약자나 병자 보살피는 일을 하고 싶어 했는데 요양보호사 자격시험 준비를 하더라고. 그 시험에 합격하여 지금은 노인요양센타에서 요양보호사 일을 하고 있어.”

“두 딸은 지금 어떻게 지내?”

“수십 년을 아들과 단둘이 살다가 며느리를 맞이하고 두 손녀를 봤으니 어머니가 얼마나 좋으셨겠어. 그 시절이 가장 행복했던 것 같다. 내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라서 애들을 제대로 챙기지 못했지. 대신 할머니가 각별히 챙기셔서 두 딸의 성장에 많은 자양분이 되었을 거야. 둘째가 여고를 졸업하자 대학 다니던 큰 애까지 중국으로 유학 가겠다는 거야. 자식들 욕망을 뒷바라지할 수 없는 내 처지가 정말 한심하더라. 우연히 친구 ㅅㄷ이와 ㄱㅅ이를 만나 자식들 안부를 묻길래 애들 문제로 갑갑했던 심정을 그냥 털어놓았지.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ㅅㄷ이 전화를 받았어. 자기들이 비용을 부담할 테니 애들 원하는 대로 유학을 보내라고. 생각지도 못한 친구들 도움으로 큰애는 북경 어언 대학을, 둘째는 톈진 중의대를 마쳤지. 나중에 도와준 돈은 갚았지만, 그 고마움은 평생 잊지 못할 거야. 큰애는 서울시 상담(商談) 통역사로, 둘째는 의사로 2년간 실무를 거친 후 귀국하여 제약회사 연구원으로 있어. 친구들 덕분에 애들이 잘 성장했어. 감사한 일이지.”

“큰 애 결혼시킬 때 이런 일도 있었어. 빚 청산으로 한참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인데 좋은 짝이 있어 결혼 날짜를 잡겠다고 하는 거야. 딸에게 처음으로 큰소리를 쳤어. 부모 형편을 뻔히 알면서 그런 중요한 일을 벌였냐고. 어찌할 바를 몰라 끙끙 앓고 있는데 세상에 이런 일도 일어나더라. 애 엄마를 알고 있는 남대문 시장 상인들이 돕겠다고 나선 거야. 이불 집에서는 혼수이불을, 한복집에서는 한복을, 그릇 가게에서는 주방용품을, 이런 식으로 십시일반 신혼살림을 장만해 준거지. 어렵거나 힘들게 사는 사람들끼리는 단단한 유대감 같은 게 있나 봐. 서로 발 벗고 나서 준거지. 그때의 벅차올랐던 내 감정 이해되지? 살면서 남에게 피해를 주기도 했지만 이런 은혜도 입어봤어. 누군가에게 갚아야 할 또 다른 빚이기는 하지만.”

“친구 모임에서 얼굴 보기 힘들다고 서운해들 하더라.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

“한때는 추억을 함께 한 소중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했어. 나로 인해 생긴 일이지만 우정이라는 이름의 민낯을 볼 때도 있어 괴롭기도 했고. 세월이 흐르면서 이젠 어떤 상황이나 생각 차이를 극복하면서까지 가까이 지내려 노력하고 싶지는 않아. 그냥 우리 사이는 여기까지구나 하는 생각이야. 담담하게 멀어지는 일에 익숙해져 가는 것 같아.”- 다음 호에 이어집니다 -